제4회 시작문학상 이덕규 시집「밥그릇 경전」선정.
머나먼 돌멩이
- 이덕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 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 아래 흐르는 물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까지
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강 건너 불빛
- 이덕규
가까스로 도망쳐 온 듯하다
쫓기고 쫓기다 간신히 강을 건너
주저앉은 짐승처럼 잔뜩 웅크려 엎드린
앞산, 중턱 옆구리께
외딴 불빛 새어 나온다
사납게 물어뜯긴 자리,
벌겋게 농익어 번져가는 신열처럼
욱신거린다 저 덧난 상처의
중심에 깊게 박힌 심, 넓게 짚어
꾹 짜 올리면 앞산이 움찔
강물이 잠깐 멈췄다가 출렁 흘러가고
뜨거운 백 촉짜리 알전구 같은
피고름 덩어리 하나 불쑥
솟아올라올 것 같다 가끔
고개 돌려 화농처럼 희미하게
흘러내리는 불빛 핥을 것도 같은데
검은 산은 끝내 꼼짝하지 않는다
참 뻐근 하게도 곪아서
씀먹쓰먹, 밤마다
잠 못 이루는 통증처럼 거기, 그가 산다
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 이덕규
먼 들판에서 일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허기가 밀려와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댈 때가 있다 사람을
삼시 세끼 밥상 앞에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밥의 오래된 폭력이다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主食)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사람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밥에게 먹힌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빈 밥통의 떨림
그러나,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밥통의 고요한 중심에 내려가 맑은 공명을 즐기듯
먹먹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논두렁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감쪽같이 배고픔이 사라지고 어떤 기운이 나를 다시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그 힘은
내 마음 어딘가에 마지막으로 밥을 제압하기 위해 비축해둔 또 다른 밥의 농밀한 엑기스인 치사량의 독과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사나흘 굶고도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벌떡 일어나 품을 팔았던 어머니들처럼
수시로 닥치는 밥의 위기 때마다 마지막인 듯 두 눈 부릅뜬 채 막다른 곳으로 밥을 밀어붙이면 비로소
밥은 모락모락 두 손 들고 밥상 위로 올라온다
그래 먼 들판에서 하던 일마저 끝내고
허적허적 돌아와 그 원수 같은 한 그릇의 밥을 죽이듯 뚝딱, 해치우고 나면
내 마음의 근골 깊은 절미항아리 속으로
낮에 축낸 한 숟가락의 독이 다시 꼬르륵, 들어차는 소리 듣는 것이다
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현대시학』등단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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