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서커스 천막 안에서 / 강성은

폴래폴래 2010. 5. 30. 12:36

 

 

 

 

 

 서커스 천막 안에서

 

                                 - 강성은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내 머리털에 기름을 끼얹고 성냥을 그어요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불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불 속에서 싱싱한 장미꽃을 피워올리지요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소리질러요 환호해요

 붉은 장미 한 송이씩 따서 어여쁜 소녀들에게 나눠주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줄기와 가시만 남은 내 머리 속에 신비한 향신료를 넣고 휘휘 저어요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부글부글 끓어 넘쳐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내 머리 속에 끓고 있는 수프를 국자로 떠먹어요

 사람들은 냄새를 맡고 취해요 서로의 머리통을 쪼개요 개들이 달려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검은 재로 남은 나를 주워모아 손으로 비벼요 훅 불어요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어두운 천막 밖으로 날아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긴 모자 속에 숨겨둔 내 머리털 하나로 다시 나를 만들어요

 나는 새로 태어나 당신이 가르쳐준 대로만 자라나요

 안녕, 안녕, 안녕, 우리는 방긋 웃으며 주문을 외워요

 천막 안으로 달이 거대한 몸을 밀고 들어와요

 사람들은 출구를 찾지 못해 달에게 깔려 납작해져요

 마술은 슬프고 우습고 달콤하고 거대하게 끝나가요

 나는 태어났다 죽었다를 반복하며 천막 안에서만 살아 있어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시집『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 2009

 

 

 

 

 

  -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