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장미의 나날
- 유하
이제 장미는 문을 닫았다, 나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
한숨 짓는다, 축제의 폭죽은 싸늘한 먼지로 사라지고
펄럭이던 혀와 술잔은 어둠의 얼룩으로 메말라 있다
흩날리는 머리칼, 웃는 얼굴들, 마음의 은밀한
기타통을 울려대던 햇살의 관능적인 손가락, 사랑은 늘
눈빛의 과녁 옆으로 미세하게 비껴나는
나비의 움직임 같은 것이었다, 바랜 꽃잎처럼
떠나버린 여인들의 자리, 그 여백만큼 갈라진
시간의 물살만이 빠르게 그 육체들을 추억했다, 매순간
내 피의 알코올을 모두 장미에게 쏟아부었고
그 붉은 빛의 동전에 취해, 나 주크박스처럼 끝없이
노래불렀다, 맡겨둔 나의 넋마저 영영 싣고 가버린
빛의 노래들 난 희망을 입술에 꿀처럼 처발랐었다
벌떼의 날갯짓, 그 온갖 말들의 황홀한 소란이 끝내
침묵이란 무덤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그러나
이제 장미는 문을 닫았고, 늦은 욕망만이 내 몸에 대롱을 꽂는다
몇 사람은 깨진 술잔처럼 흩어졌고, 일부는 어둠 저편으로
빨려나갔다, 오솔길 끝에서 노래 없이 난 말한다
그 열애의 지저귐, 노래의 살결을 귀 멀도록 빛나게 한 건
정적의 힘이었음을, 하여 나 지금 장미의 닫힌 문 앞에서
담담하게 입술을 닦는다 오, 희망이여, 나의 벌레여,
오늘 나는 환멸에게 인사하련다 향기의 해골에 기대어
장미는 문을 잠그고, 내 푸른 영혼도 노래를 따라 날아갔다
시집『세운상가 키드의 생애』
- 유하(본명: 김영준)
1963년 전북 고창 출생. 세종대 영문과,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 졸업.
1988년『문예중앙』등단.시집<무림일기><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세상의 모든 기억><세운상가 키드의 생애><천일馬화> ' 21세기 전망'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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