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나무가 있는 풍경 / 김경성
꽃송이 솟아있는 꽃살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무의 생이 보인다
시들지 않는 꽃으로 피어나서
꽃잎 낱장마다 오래된 시간의 향기가 기억되어 있다
우리의 생보다 더 오래, 몇백 년 동안
고마리꽃 쏟아지는 개울물까지 뿌리 뻗어서
잎맥마다 서늘하게 마음 두었을 것이므로,
저 꽃살문 속에서는 지금도 한 그루의 나무가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빛도 뚫지 못하는 꽃잎, 향기 그윽하다
문 이쪽과 저쪽
수수만년 동안 닿지 못하는 경계 너머에 너는 있고
그만큼의 거리에서 나는 울고 있다
꽃잎 흔들리도록 문을 열어도 닿을 수 없다
어서 오라고
어서 와서 눈물 닦아내라고
그대가 심어놓은 매화 한 그루, 늦가을에 꽃 벌창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향기
휘청휘청 소름 돋는다
늙은 자목련 굽이굽이 휘어진 가지 끝마다
꽃눈 틔워서 풍경소리 어루만지고
티티 티티
가을볕, 꽃살문에 기대는 소리 터진다
오래된 나무가 내는 꽃잎의 소리를 마시며
자북자북 쌓이는 꽃 그림자 거두어서
문 너머 닿을 수 없는
너의 심장 근처까지
향기 흘려보낸다
깃털 잃은 새들,
흰 뼈 마디마디에
날개짓으로 쓸어놓은 길의 지도를 돋을새김하는
늦가을이다
바람의 발자국 / 김경성
키 큰 느티나무의 몸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바람을 보았다
나뭇잎의 낱장마다 속속들이
소소속 바람이 박히는 소리, 그 소리
나무의 몸속으로 들어가 나이테의 행간을 휘돌아서
쏴 와와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바람의 신발
한 짝 두 짝 주워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지문처럼 번져 있는 바람의 무늬 손금 닮았다
느티나무의 몸속에 남아있는 바람, 잎 젖혀가며 내게로 와서
발자국을 찍어대고
나는 기왓장 틈 아슬아슬하게 꽃을 피운 씀바귀처럼
절집 마당에 오래 앉아
발자국에 고이는 바람의 말을 읽었다
무언가 간절히 그리워지는 해질 무렵,
몸과 마음을 열어놓으니
몸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
그대 마음인 듯 따뜻해서
흩어져 있는 바람의 발자국 가만가만 만지며 산길 걸었다
내 몸 스치는 곳마다
숲 떨림의 소리 가득했다
달의 궁전 / 김경성
처음부터 높은 곳에 달의 방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해찰 하는 사이 달은
나무 우듬지에 걸터앉아
호시탐탐 우리 근처를 배회했던 것이다
날개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나무 모양으로 세우고
수백 채의 집을 지어 달의 방을 만들었다
비밀번호를 몰라도 방으로 들어가는 법을 아는 달은
지금도 몸 굴리거나 몸 열어 여러 개의 방을 삼키면서
사람들을 끌어안는 것이다
가장 높은 꼭대기의
집 한 채,
다른 집보다 한 뼘은 더 깊은 방에 사는 그가
보름날 금실로 짜 넣은 달그림자 접어놓고
달의 문을 열어 내 손에 열쇠를 쥐어주었을 때
솜털 세운 달의 가슴 부풀어 올라
물오른 나무도 덩달아서 향기 분질러대며
열꽃 같은 꽃망울 터트렸다
문을 열고
쏟아져 나오는 달빛
삼키며 달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달의 궁전은, 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닳아버린 달의 안쪽이 다시 커지는 만큼의 시간이거나
먼 곳까지 빛의 그물 드리워 달의 몸이 작아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달의 문짝 너머로
부풀어 오른 달의 가슴이 보이는
그의 방이 달의 궁전이다
*달의 궁전 - 폴 오스터의 장편소설 '달의 궁전'
시인의 말
바람이 되어, 나를 찾아서 떠난다.
이른 새벽 첫차에 몸을 싣는 일처럼 마음 설레는 것 어디에 있을까? 낯선 곳에 첫발을 내디딜 때의 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그루의 나무가 꽃으로 피어나기까지 기다렸던 시간의 비늘 한 켜 보다 더 짧은시간 동안이지만, 낯선 곳에서 내 안에 들어 있는 낯선 나를 만난다. 눈물이 나게 쓸쓸한 시간도 있다. 눈물이나면 손등으로 쓰으윽 눈물 닦아내고 걷는다. 오래 걷다 보면 고요하게 몸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있다. 나무가 새가 들꽃이 바람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몸 열고, 마음 열어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으면, 내 안으로 들어와 고요하게 자리 잡는 것들이 있다.
문득, 뼈대만 남아있는 폐염전에 닿는다. 소금 꽃 지고, 박제된 새처럼 마른 나문재, 오래 그 자리에 있는 시간의 유적 속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새로 시작하는 것임을 나는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체는 아니다. 깃털 하얀 박주가리 훨훨 날아 빛을 내는 틈으로, 며느리 밑씻개 마른 잎 햇빛 받아 붉은 꽃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폐염전 속으로 들어가 숭숭 뚫려 있는 천정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오래 바라보고 서 있으면, 새들이 깃털 흔들며 날아간다. 억새꽃 피어 햇빛 걸러서 눈부시게 한다. 폐염전 속에서도 살아있는 것들의 빛남이 있다.
바람이 되어 폐허에 닫는 일, 곧 내가 폐허이기 때문이다. 내 몸을 뚫고 지나간 상처의 자국이나 기쁨의 자국들이 보이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내가 폐허이게 하듯이, 무언가 있었던 자리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다. 움트는 씨앗들의 소리와 길의 무늬를 그리는 칡덩굴 휘어진 그늘 건너 제비꽃 꽃술의 떨림이 있다. 폐허에 서서 폐허가 아니었던 시간 속 여행을 한다.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그때 불었던 바람의 결을 느낀다. 그들과 교감을 한다. 그 순간,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바람이 되어, 나를 찾아 나선다. 바람이 되어, 폐허를 찾아 나선다. 폐허 속에 오래 앉아 오래된 것들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나를 부드러운 바람이게 만드는 바람의 결을 타고, 내 몸 가득 피어 있는 꽃무늬 하나하나 지워지지 않게 돋을새김 한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내 몸과 마음에 새겨 넣는다. 이른 새벽 목단 꽃잎 가슴에 붙이고 오래된 탑 너머에 있는 그리운 그대, 낯선 나를 만나러 간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다.
우리시(2009.3월호)
- 전북 고창 출생.
2005년 '예술세계'등단
'詩心의 향기 > 시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잠자리, 천수관음에게 손을 주다 우는 /김선우 (0) | 2009.03.05 |
|---|---|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0) | 2009.03.05 |
| 봄 편지 / 이병초 (0) | 2009.03.04 |
| 봄날 불지르다 / 유영금 (0) | 2009.03.03 |
| 순천만 갈대숲 / 복효근 (0) | 2009.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