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의 오솔길/시창고

눈보라 / 황지우

폴래폴래 2008. 12. 30. 11:30

 

 

 

 

 

 

 

              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숨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게 눈 속의 연꽃>등 5편. 김수영문학상, 현대 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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