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크리스마스
노준옥
바슐라르를 읽다가 갑자기 부엌으로 가서
김장김치 한포기를 썰지도 않고 죽죽 찢어 서서 먹는다
입안에 가득 한겨울 시린 배추밭이 들어온다
새파란 무우청 줄지어선 무밭도 들어오고
붉은 고추밭도 총총한 마늘밭도 다들 살아서 들어온다
어쩌구저쩌구 고매한 정신에 밑줄 따라 그어가며
한량없이 쫓아가던 나의 정신에 느글거리던 이론에
과감히 고춧가루를 뿌리는 이 한밤의 역설
허구에 시달리며 또한 허구에 목마른 나는
이 긴긴 동짓달 하룻밤을 아름다운 사색으로 채우려 했건만
나의 정직한 식욕은 실체를 원했던 것이다
시뻘건 고춧가루와 노오란 마늘과 시퍼런 파와 청각과 가지가지의 재료들이
망상과 그리움과 고단함과 분노와 욕망과 회환과 무료함과 간절함과
익어가는 여인의 허연 장딴지 같은 배추의 속살에 범벅이 되어
불현듯 아름다워진 나의 크리스마스 저녁
바슐라선생
꿀꺽 침을 삼키며 날 쳐다보고 있다
*2001년 <시와 사상>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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