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의 오솔길/신인상

202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폴래폴래 2020. 1. 2. 19:28

202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풀씨창고 쉭쉭


​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있다


노루발, 뻐국새,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이 움튼다

 

이주송 :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