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안하는 애인
박라연
먹고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저는 이제 아닙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세계에 살게
되어서입니다.
마음의 새끼들이 태어날 때마다 나는 다른
여자가 됩니다.
아련할 때마다 태어나서는 천천히 풀리어서
물속으로 사라집니다.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서 사라집니다.
내 사랑 드디어 거대한 물방울이 되었습니다.
물방울 사이로 붉은 피가 낙조처럼 눈부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이 가능한
사이입니다.
사라지면서 태어나는 거대한 물방울 속의 수많은
물방울들은
너무 빨랐거나 너무 늦어서 만질 수 없던
내 어린 날의 물방울들일까요?
『시와함께』창간호. 2019년 가을호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공중 속의 내 정원>
<우주 돌아가셨다><빛의 사서함>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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