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의 오솔길/신인상

2018년 문화일보,전북도민일보 신춘 당선작

폴래폴래 2018. 1. 6. 14:19

[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 



발코니의 시간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2018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인디고

 

박은영

 

빈티지 구제옷가게,

물 빠진 청바지들이 행거에 걸려 있다

목숨보다 질긴 허물들

한때, 저 하의 속에는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다

세상 모든 얼룩은 블루보다 옅은 색

짙푸른 배경을 가진 외침은 닳지 않았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면

멍드는 건 속살이었다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과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와

기장이 길어 끌려가던

울분의 새벽을 블루 안쪽으로 감추고

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인디고는

인내와 견디고의 합성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애벌레들은 청춘의 옷을 벗어야 한다

질긴 허물을 찢고 맨살을 드러내는

각선의 방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대생들이

세상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녁의 밑단

빈티지가게는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

물 빠진 허물,

그 속에 살았던 푸른 몸은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을까

청바지 무릎이 주먹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이다

*인디고: 청색염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