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산당화의 추억 / 황동규

폴래폴래 2016. 10. 28. 12:30






           산당화의 추억



                                       -황동규


  1

  生의 나중 반절을 부안반도 남쪽 입구에 숨어 산

  반계 유형원의 글쓰던 집을 찾아

  골목길 입구에서 쥬스 한 캔 사 마시고

  사슴 두 마리 물끄러미 서 있는 조그만 농장을 돌아

  산길 오르기 직전

  이리저리 이름 모를 새 소리 찾는 눈에

  피어 있던 한 무리 산당화.

  알맞은 키의 조그맣고 바알간 불씨들 너무 예뻐

  손등을 가시에 긁히며

  하나씩 가운데 노란 꽃술까지 하나씩

  만져본다.


  2

  추억은 인간을 사람으로 만든다.

  큰 바위가 나타나고

  길이 가팔라지며 숨이 가쁠 때

  바위 앞에 발 앞에

  진초록빛 끈 하나가 움직일 때

  마음속에 켜 있던 저 불씨들.

  초록 독뱀에 놀라고 놀람이 곧 초록빛 호기심이 되는,

  질겁하는 손과 만져보고 싶은 손이

  한 손에서 일순 만나 손을 완성하는,

  손이 점차 투명해지는,

  '사람' 의 설렘.


  3

  아무도 없다.

  마당 옆 납작한 돌 쌓은 우물엔

  이끼 파랗고

  왼편 방 마루를 한 단 높여 난간 두른

  간편한 누마루

  조용히 앉아

  간편하게 손으로 어루만져본다.

  아까 울던 새가 언제부터인가 다시 울고

  손에 나무의 무늬가 묻어난다.

  무늬가 살아 있었구나

  한때 숨쉬며 설레고 꿈꾸던

  나무들의 환희 고통 추억이.


  4

  반계의 집에서 반계를 잊고 내려온다.

  아까 뱀 만난 자리에 오니

  바로 길 옆에 불켜놓고 서 있는 산당화들.

  왜 좀 전엔 못 보았을까.

  전처럼 손을 내미니

  이번엔 가시들이 '손대지 말아요!'

  (나도 아무나 만지는 것이 싫었어,

  자신도 모르게 내 가슴을 훑은 자들!)

  공중에서 슬그머니 손을 거두어

  가슴을 쓸어본다.

  과거 손 못 대본 모든 것의 추억들이 설렌다.

  그 설렘들,

  사람이 설레는 순간을 그 누가 간단히 잡을 수 있으랴?

  몸 속을 눈감고 달리는 저 無量의 피

  먹구름 속에서 울리지 않고 거푸 치는 징

  저 깊이 잴 수 없는 보랏빛 속 반디들의 흩날림

  그 순간 하나를 저장하려면

  용량 1기가바이트도 부족하리.

  두 손을 차례로 들여다본다.

  손이 점차 투명해지고

  반디들이 여기저기 뜨고

  저 환한 시간의 멈춤!



  시집『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문지 2000년




  -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 에딘버러대 수학.

   1968년 등단하여 시집<어떤 개인 날><풍장><외계인>등 10여권.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

   서울대 영문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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