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당화의 추억
-황동규
1
生의 나중 반절을 부안반도 남쪽 입구에 숨어 산
반계 유형원의 글쓰던 집을 찾아
골목길 입구에서 쥬스 한 캔 사 마시고
사슴 두 마리 물끄러미 서 있는 조그만 농장을 돌아
산길 오르기 직전
이리저리 이름 모를 새 소리 찾는 눈에
피어 있던 한 무리 산당화.
알맞은 키의 조그맣고 바알간 불씨들 너무 예뻐
손등을 가시에 긁히며
하나씩 가운데 노란 꽃술까지 하나씩
만져본다.
2
추억은 인간을 사람으로 만든다.
큰 바위가 나타나고
길이 가팔라지며 숨이 가쁠 때
바위 앞에 발 앞에
진초록빛 끈 하나가 움직일 때
마음속에 켜 있던 저 불씨들.
초록 독뱀에 놀라고 놀람이 곧 초록빛 호기심이 되는,
질겁하는 손과 만져보고 싶은 손이
한 손에서 일순 만나 손을 완성하는,
손이 점차 투명해지는,
'사람' 의 설렘.
3
아무도 없다.
마당 옆 납작한 돌 쌓은 우물엔
이끼 파랗고
왼편 방 마루를 한 단 높여 난간 두른
간편한 누마루
조용히 앉아
간편하게 손으로 어루만져본다.
아까 울던 새가 언제부터인가 다시 울고
손에 나무의 무늬가 묻어난다.
무늬가 살아 있었구나
한때 숨쉬며 설레고 꿈꾸던
나무들의 환희 고통 추억이.
4
반계의 집에서 반계를 잊고 내려온다.
아까 뱀 만난 자리에 오니
바로 길 옆에 불켜놓고 서 있는 산당화들.
왜 좀 전엔 못 보았을까.
전처럼 손을 내미니
이번엔 가시들이 '손대지 말아요!'
(나도 아무나 만지는 것이 싫었어,
자신도 모르게 내 가슴을 훑은 자들!)
공중에서 슬그머니 손을 거두어
가슴을 쓸어본다.
과거 손 못 대본 모든 것의 추억들이 설렌다.
그 설렘들,
사람이 설레는 순간을 그 누가 간단히 잡을 수 있으랴?
몸 속을 눈감고 달리는 저 無量의 피
먹구름 속에서 울리지 않고 거푸 치는 징
저 깊이 잴 수 없는 보랏빛 속 반디들의 흩날림
그 순간 하나를 저장하려면
용량 1기가바이트도 부족하리.
두 손을 차례로 들여다본다.
손이 점차 투명해지고
반디들이 여기저기 뜨고
저 환한 시간의 멈춤!
시집『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문지 2000년
-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 에딘버러대 수학.
1968년 등단하여 시집<어떤 개인 날><풍장><외계인>등 10여권.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
서울대 영문과 교수 역임.
'詩心의 향기 > 시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물통 속의 눈 / 이지담 (0) | 2016.12.06 |
---|---|
능구렝이 / 박성우 (0) | 2016.11.28 |
미이라 / 박성우 (0) | 2016.10.20 |
망해사 / 박성우 (0) | 2016.10.20 |
거미 / 박성우 (0) | 2016.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