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동백 그리고 기이한 바다 / 정화진

폴래폴래 2016. 8. 18. 14:22






        동백 그리고 기이한 바다


                                                  - 정화진


                     무거운 삶을 버릴 듯 몇몇 사람들은 헤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마른 바람이 도시의 골목들을 훑고 온다.

                     겨우 한 송이 꽃망울을 차가운 대기 속에 내밀어 보이

                   는 동백, 무슨 불씨처럼 무거움을 조금 찢어 놓고 가는

                      붉은 바다 흰 갈매기 떼



   정밀하고 뜨겁다

   흰 풍경을 가로지르며 난바다가 다가오고 있다

   기척도 없는 고요 위로 백동전 한 잎 정밀을 깨뜨리며 떨어진다

   누군가 쇠사슬의 무거운 걸음으로 계절과 바다를 헤치며 피 묻은

시간을

   끌어안고 천천히 서툴게 다가선다

   흰 바다 붉은 갈매기

   바다의 시간은 물결 위로 덧없이 밀려왔다


   거친 대륙의 멀리 어디선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간간이 기척 없이 빙판과 폭설 사이로 바다는 잠시 속살을 드러내

보였다

   바다는 벽이었다 얼음과 광선의 벽


   때때로 끈끈한 타르 같기도 했던 바다

   만지면 늪처럼 손가락을 잡아당길 듯 컴컴한 어둠이었던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쳐온다

   누군가 또 술을 마셨나 보다 때때로 텅 빈 광장과도 같은 바다


   수은등이 켜지고

   무대는 파르스름하다 두부 한 모의 바다

   텐트를 치고 몇몇 사람들은 검은 바다를 배경으로 눕는다

   추위를 못 견디겠다는 듯이 닭털 침낭 속에 꿈틀대는 포유동물들

   상현달이 지고 있었다

   부서져 구멍난 조개껍질들이 널린 무대


   끼루룩 죽어간 혼들이 갈매기 떼로

   그 검은 무대 위에 뜬다

   핏빛 동백 한 송이가 뭍의 끝 가지 위에서 피어올랐다

   폭설이었다

   막이 내려진 바다

   빙벽인 채 우두커니 광선을 내뿜고 있던 바다

   사람들은 하나 둘 행구를 챙겨 자리를 뜬다 엄습하는 추위 또는 텅

빈 무대 그리고 광장

   눈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시집『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민음사 1994년




  -1959년 경북 상주 출생. 1986년<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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