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그리고 기이한 바다
- 정화진
무거운 삶을 버릴 듯 몇몇 사람들은 헤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마른 바람이 도시의 골목들을 훑고 온다.
겨우 한 송이 꽃망울을 차가운 대기 속에 내밀어 보이
는 동백, 무슨 불씨처럼 무거움을 조금 찢어 놓고 가는
붉은 바다 흰 갈매기 떼
정밀하고 뜨겁다
흰 풍경을 가로지르며 난바다가 다가오고 있다
기척도 없는 고요 위로 백동전 한 잎 정밀을 깨뜨리며 떨어진다
누군가 쇠사슬의 무거운 걸음으로 계절과 바다를 헤치며 피 묻은
시간을
끌어안고 천천히 서툴게 다가선다
흰 바다 붉은 갈매기
바다의 시간은 물결 위로 덧없이 밀려왔다
거친 대륙의 멀리 어디선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간간이 기척 없이 빙판과 폭설 사이로 바다는 잠시 속살을 드러내
보였다
바다는 벽이었다 얼음과 광선의 벽
때때로 끈끈한 타르 같기도 했던 바다
만지면 늪처럼 손가락을 잡아당길 듯 컴컴한 어둠이었던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쳐온다
누군가 또 술을 마셨나 보다 때때로 텅 빈 광장과도 같은 바다
수은등이 켜지고
무대는 파르스름하다 두부 한 모의 바다
텐트를 치고 몇몇 사람들은 검은 바다를 배경으로 눕는다
추위를 못 견디겠다는 듯이 닭털 침낭 속에 꿈틀대는 포유동물들
상현달이 지고 있었다
부서져 구멍난 조개껍질들이 널린 무대
끼루룩 죽어간 혼들이 갈매기 떼로
그 검은 무대 위에 뜬다
핏빛 동백 한 송이가 뭍의 끝 가지 위에서 피어올랐다
폭설이었다
막이 내려진 바다
빙벽인 채 우두커니 광선을 내뿜고 있던 바다
사람들은 하나 둘 행구를 챙겨 자리를 뜬다 엄습하는 추위 또는 텅
빈 무대 그리고 광장
눈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시집『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민음사 1994년
-1959년 경북 상주 출생. 1986년<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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