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엽(葉)의 청산 / 이진명

폴래폴래 2016. 4. 2. 14:59






           엽(葉)의 청산


                                             - 이진명



  오래전 책 하나가 부쳐져 왔다

  수년 설산을 오가며 구도한 내용의 구도기였다

  속표지에 짧지 않은 글이 가득 쏟아져 있었다


    문예지『ΟΟΟΟ』을 발행했던 葉입니다.

    곧『ΟΟΟΟ』을 접고,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수년 길을 떠난 저의 고혈(膏血)의 여정입니다.

    예전 귀한 원고에 마땅히 고료를 지불해야 했으나,

    어려운 사정상 고료를 지불치 못했던 죄송한 일을

    이 책을 받으심으로 부디 탕감해 주시길 빕니다.


  웬일인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ΟΟΟΟ』도 원고 실렸을 일도 葉이라는 이름도

  하지만 그랬을 법한 일 맞을 것 같기도 했다

  괜한 더듬음이었던지 역시 기억은 오지 않았다


  無로부터 솟아난

  無로부터 오래도 걸어와 도착한

  황색 葉의 세계

  설산을 날고 휴전의 국경선을 넘고

  남쪽으로 강은 더 멀지만

  강북 한 전망 없는 아파트에 도착한

  잎맥, 잎맥마다가 아려 오는

  고혈 나뭇잎 한 장


  한 장의 어슴한 몸뚱이

  無로부터 기어온

  (날아왔지만 기어온 사십만 번의 오체투지!)

  필생의 청산

  向도 없이 꺾여 앉은 여기 강북 아파트처럼

  세상 시세라고는 바삭 소리도 없는

  필생의, 그러나

  따뜻한 남쪽으로 向이 나고

  강이 흐르는 꿈같은 전망을 달리기 시작한

  한 장 葉의 청산




  『서정시학』2016년 봄호




  - 1990년 계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단 한 사람><세워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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