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물가에서 우리는 / 이승희

폴래폴래 2015. 8. 13. 14:57

 

 

 

 

 

               물가에서 우리는

 

 

                                                      - 이승희

 

   발을 씻는다

   버드나무처럼 길게 발가락을 내어 놓는다

   세상의 모든 염려를 품고

   울음을 참고 있는 나무들이 있어

   오늘 당신과 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이 캄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 발이 물 속에서 한없이 겸손해진다

   눈이 없는 물고기처럼 당신의 손가락을 스친다

 

   이제 더는 애쓰면서 살지말아요

   어떻게든 사는 건

   하지 말아요

 

   읽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없었으므로

   이제 나는 눈 없는 물고기로 살거나 죽거나

   당신 옆에 눕고 싶은 것일 뿐

   상처 가득한 지느러미가 환해질 때까지

   달빛이나 축내면서

 

   어떤 당부도 희미해진 지금

   말간 물이 발목에서 뒤척이는 건

   마치 어떤 전생 같아서

   몽유의 날들을 세어 본다

   세어 보는 손가락이 붉어져서

   물가의 나무들은 속으로만 발가락을 키운다

 

 

   『현대시학』2015년 7월호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1997년<시와사람>으로,1999년<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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