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꽃멀미 / 이문재

폴래폴래 2015. 5. 21. 15:57

 

 

 

 

 

       꽃멀미

 

                                     - 이문재

 

  봄꽃들은

  우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심산이다

  만발한 저 어린것들을

  앞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 돼지저금통 깨

  외출하는 봄날 아침

  안개가 걷혔는가 싶었는데

  저런 저기 흰 벚꽃

  박물관 입구 큰 벚나무

  작심한 듯 꽃을 피워놓고 있었다

 

  희다 못해 눈부시다 못해

  화공약품 뿌린 듯한 오래된 벚나무

  흰빛은 모든 빛을 거부해서 흰빛

  가까이 가면 내가 표백될 것 같았다

 

  동창 녀석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왼쪽 구두코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고

  웃저고리에서는 아직도 삼겹살 냄새

 

  나트륨 등 켜져 있는

  농업박물관 입구

  수화하듯이 흰 꽃잎 두어 장

  새벽 한시 근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야 임마 내가 이렇게 떳떳한 것은

  내가 이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라는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집『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1959년 경기 김포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시운동>으로 등단. 시집<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마음의 오지> 산문집<내가 만난 시와 시인>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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