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멀미
- 이문재
봄꽃들은
우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심산이다
만발한 저 어린것들을
앞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 돼지저금통 깨
외출하는 봄날 아침
안개가 걷혔는가 싶었는데
저런 저기 흰 벚꽃
박물관 입구 큰 벚나무
작심한 듯 꽃을 피워놓고 있었다
희다 못해 눈부시다 못해
화공약품 뿌린 듯한 오래된 벚나무
흰빛은 모든 빛을 거부해서 흰빛
가까이 가면 내가 표백될 것 같았다
동창 녀석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왼쪽 구두코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고
웃저고리에서는 아직도 삼겹살 냄새
나트륨 등 켜져 있는
농업박물관 입구
수화하듯이 흰 꽃잎 두어 장
새벽 한시 근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야 임마 내가 이렇게 떳떳한 것은
내가 이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라는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집『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1959년 경기 김포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시운동>으로 등단. 시집<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마음의 오지> 산문집<내가 만난 시와 시인>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