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영문법 시간 / 신철규

폴래폴래 2013. 12. 16. 14:33

 

 

 

 

 

 

 

  영문법 시간

          ─기생

 

                                             - 신철규

 

 

 푸른 색에서 붉은 색으로 여행하는 사과를 때까치들이 쫀다

 만년필 촉 같은 부리로 집요하게 파내려간다

 새는 한 번 쫀 사과를 다시 쪼지 않는다

 

 사과 속살처럼 새하얀 애벌레는 몸을 말고

 어떤 적의도 없이 달콤한 우화의 꿈을 꾼다

 끈적끈적한 어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혓바닥이 없으면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다

 자신의 혓바닥을 잘라내려고 악관절에 힘을 주다가

 스르르 힘이 풀릴 때

 우리는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관 뚜껑도 벌레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

 벌레는 내 안에 더 많다

 내 몸은 벌레들의 식민지

 내 몸은 낙서와 이끼로 덮인 방공호

 내 몸은 모든 꿈의 종착역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기 위해 입을 한껏 벌릴 때

 찡그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은 환희인가 슬픔인가

 

 사과는 단단해지기를 포기한다

 사과는 흐물흐물해지면서 녹아내린다

 

 영혼의 애벌레가 뜨거운 혓바닥 위를 기어간다

 

 구름은 하얗게 타오른다

 자신을 만든 물방울들을 태우며

 

 

 

 『미네르바』2013년 겨울호

 

 

 

  -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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