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법 시간
─기생
- 신철규
푸른 색에서 붉은 색으로 여행하는 사과를 때까치들이 쫀다
만년필 촉 같은 부리로 집요하게 파내려간다
새는 한 번 쫀 사과를 다시 쪼지 않는다
사과 속살처럼 새하얀 애벌레는 몸을 말고
어떤 적의도 없이 달콤한 우화의 꿈을 꾼다
끈적끈적한 어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혓바닥이 없으면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다
자신의 혓바닥을 잘라내려고 악관절에 힘을 주다가
스르르 힘이 풀릴 때
우리는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관 뚜껑도 벌레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
벌레는 내 안에 더 많다
내 몸은 벌레들의 식민지
내 몸은 낙서와 이끼로 덮인 방공호
내 몸은 모든 꿈의 종착역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기 위해 입을 한껏 벌릴 때
찡그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은 환희인가 슬픔인가
사과는 단단해지기를 포기한다
사과는 흐물흐물해지면서 녹아내린다
영혼의 애벌레가 뜨거운 혓바닥 위를 기어간다
구름은 하얗게 타오른다
자신을 만든 물방울들을 태우며
『미네르바』2013년 겨울호
-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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