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철길, 핏줄 / 최영미

폴래폴래 2013. 6. 21. 11:13

 

 

 

 

 

 

 

 

 

 철길, 핏줄

 

 

                                       - 최영미

 

 

 나는 여기서 살았다

 버드나무 늘어진 기찻길 옆.

 진한 활엽수의 옆구리를 만지며

 부모와 떨어진 계집애는 부스럼을 앓았다

 철도원이었던 할아버지의 품에서

 흔들리는 것이 좋아서, 몸에 익은

 열차의 진동이 피를 회전시킨다

 

 양반의 망건을 벗고 근대의 다리를 놓은

 당신의 만만한 무르팍에 안겨서

 할미의 자장가가 코스모스 뒤로 스치는

 서울로 가는 길.

 

 할아비가 만든 철도를

 아들이 달리고

 손녀가 달리고

 

 아비의 혁명을 유산시킨 철길이

 딸의 연애도 끊어놓고

 

 소주를 들이붓고 헛디딘 나의 젊은날이

 무른 두부처럼 허술했던 아비의 청춘과 엇갈리며

 

 웃자란 나무들이 수근거리는

 숲의 낭만이 싫어서

 객실에 팽개쳤던 상념들을 엮어

 강철의 핏줄을 더듬는다

 아비가 모르는 서양음악을 들으며

 

 

 시집『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 2009

 

 

 -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2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꿈의 페달을 밟고><돼지들에게>

   산문집, 미술에세이, 장편소설, 번역서가 있다.

    2006년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