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也者覺也(학야자각야) / 다산
─배움은 깨닫는 것이다.
다산은 1762년(영조 38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해남 윤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4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을 하였고, 16세에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의
저서를 접하고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2세 때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경의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정조의 눈에 뛰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28세 때에 문과에 급제한
후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즈음 그는 수원화승을 쌓는데 거중기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목민관의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
(1801년) 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되었는데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처음에 강진의 동문밖 주막(사의재)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그리고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1808년 윤단의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이사하였으며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을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으로 승화시키게
되었다. 5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의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다산초당은 우리나라 실학을 집대성한 장소이다. 한편 동암과 서암 두 초막을
짓고 제자 18명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57세 되던 1818년(순조 18년)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완성하였으며 회갑을 맞이하여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1836년(헌종 2년) 7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자택인
여유당 뒷산에 묻혔다. 1910년(순종 4년)에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고깔제비꽃
잎의 밑 부분 가장자리가 안쪽으로 말려서 중이
머리에 쓰는 고깔 모자처럼 되어 고깔제비꽃이다.
노랑제비꽃
해월루
별꽃.
쇠별꽃하고 구분해 보세요.
민눈양지꽃
땅에 납짝 붙어 있다.
보통은 그냥 밟고 다닌다.
천일각
한 모금의 찻물에 부산하다.
정석 : 다산초당 제 1경
다조 :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곳
뿌리의 길
다산유물전시관
위 하피첩의 매조도를 읽어 보자
다산유물관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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