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풀등, 바다의 등 / 강영은

폴래폴래 2012. 10. 11. 11:18

 

 

 

 

 

 

 

 풀등, 바다의 등

 

                                      - 강영은

 

 

 

 풀등이란 말, 풀에게도 등이 있다는 말

 입에 풀칠을 하거나

 입을 다문 소식에 우표를 붙이거나

 늙어가는 입술에 착착 달라붙는 말 같아서 참, 좋다

 

 풀여치가 밟고 가고 실잠자리가 알을 낳는 등

 사는 동안 그보다 가벼운 등을 못 만났지만

 제 몸보다 커다란 짐승의 발자국은 그냥 눈감아버리고

 가냘픈 등에게만 허락하는 말 같아서 참, 따뜻하다

 

 밭고랑에 박혀 일만 하던 어머니도

 학자금을 빌리던 아버지도

 멀리서 보면 한 포기 풀, 이제는 풀만 무성한 무덤가에서

 살랑대는 말 같아서 참, 쓸쓸하다

 

 연인들이 반지를 교환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풀등

 참, 좋고 따뜻하고 쓸쓸한 등이 있다는

 대이작도로 간다

 풀반지로 족할 가난한 사랑 하나 만날 수 있다면

 그 등이 기대어

 파도와 몸을 섞는 이름 없는 풀이어도 좋겠다

 

 뿌리가 뽑히기 전에

 제자리를 떠날 수 없는 풀들이

 섬의 안쪽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휘어질수록 물보라를 날리는 물빛 등만 출렁일 뿐

 풀등은 보이지 않는다

 

 풀등은 모래바람 날리는, 모래로만 말하는 등

 물고기의 뼈가 삭아져 내린 바다의 등

 바닷바람에 휘청거리던 내 등이 펴진 건

 은갈치 떼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등을 본 직후였다

 등이란 본래 스스로 일어서는 직립의 뼈대였던 것

 

 25억 1천만 년 전에 수장된 나를 다시 보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풀등: 대이작도, 바다 한가운데 길게 펼쳐진 모래섬.

 

 

 

 『문학과 창작』2012년 봄호

  시집『풀등, 바다의 등』문학아카데미 2012년

 

 

 

  - 제주 출생. 제주교대 졸업.

   200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스스로 우는 꽃잎><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

   <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

   시예술상 우수작품상, 한국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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