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등, 바다의 등
- 강영은
풀등이란 말, 풀에게도 등이 있다는 말
입에 풀칠을 하거나
입을 다문 소식에 우표를 붙이거나
늙어가는 입술에 착착 달라붙는 말 같아서 참, 좋다
풀여치가 밟고 가고 실잠자리가 알을 낳는 등
사는 동안 그보다 가벼운 등을 못 만났지만
제 몸보다 커다란 짐승의 발자국은 그냥 눈감아버리고
가냘픈 등에게만 허락하는 말 같아서 참, 따뜻하다
밭고랑에 박혀 일만 하던 어머니도
학자금을 빌리던 아버지도
멀리서 보면 한 포기 풀, 이제는 풀만 무성한 무덤가에서
살랑대는 말 같아서 참, 쓸쓸하다
연인들이 반지를 교환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풀등
참, 좋고 따뜻하고 쓸쓸한 등이 있다는
대이작도로 간다
풀반지로 족할 가난한 사랑 하나 만날 수 있다면
그 등이 기대어
파도와 몸을 섞는 이름 없는 풀이어도 좋겠다
뿌리가 뽑히기 전에
제자리를 떠날 수 없는 풀들이
섬의 안쪽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휘어질수록 물보라를 날리는 물빛 등만 출렁일 뿐
풀등은 보이지 않는다
풀등은 모래바람 날리는, 모래로만 말하는 등
물고기의 뼈가 삭아져 내린 바다의 등
바닷바람에 휘청거리던 내 등이 펴진 건
은갈치 떼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등을 본 직후였다
등이란 본래 스스로 일어서는 직립의 뼈대였던 것
25억 1천만 년 전에 수장된 나를 다시 보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풀등: 대이작도, 바다 한가운데 길게 펼쳐진 모래섬.
『문학과 창작』2012년 봄호
시집『풀등, 바다의 등』문학아카데미 2012년
- 제주 출생. 제주교대 졸업.
200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스스로 우는 꽃잎><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
<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
시예술상 우수작품상, 한국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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