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청보리밭 / 박이화

폴래폴래 2012. 9. 26. 16:16

 

 

 

 

 

 

 

 청보리밭

 

                                      - 박이화

 

 

 

 도루코 면도날이 지나간 자리처럼

 잘 다듬어진 잔디밭은

 내 발길을 머뭇거리게 하거나 돌려세우고 만다

 거울 속 면도하는 남자처럼

 그만의 얼굴에 빠져 있는 듯한 잔디밭은

 어쩐지 다가서기도 건드리기도 불안하다

 그러나 몇날 며칠 깎지 않은 수염처럼

 거칠고 꺼끌꺼끌한 보리밭을 지날 때면

 옛 남자를 본 듯 반갑고 가슴 뛴다

 쓰다듬을 때마다

 손바닥 따끔따끔 찌르는 수염은

 그가 키운 억센 야성의 그리움 같아

 와이셔츠 단추를 풀듯

 개망초꽃 하나 둘 풀어헤치고

 등에 풀물 베이도록 와락, 그를 안고 싶어진다

 그럴 때 바람은 거품 같은 구름을 풀어

 비탈 전체를 밀어 버릴 듯 지나가겠지만

 그럴수록 보리는 거웃처럼 무성하게 다시 일어설 테지

 고랑마다 더 비리고 축축한 청보리 냄새 풍길 테지

 예나 지금이나 짐승의 피를 나눈 것들은

 이토록 후안무치해서

 멀리 둥근 눈을 가진 새들마저

 몰카처럼 찰칵찰칵 날아간다

 무인모텔, 그 청보리밭 비탈에선

 

 

 

 『애지』2012년 여름호

 

 

 

 

  -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남해, 대구에서 성장.

    1998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그리운 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