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노루귀꽃,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
- 박남준
이제 뜰 앞의 산과 강 모든 들판은 꽃들의 세상
묵묵히 지난 시간의 겨울을 견뎌온 것들이
일제히 광장의 깃발처럼 지상에 나부낀다
얼굴을 맞대고 내걸린다
한 꽃이 피고 지고 그 꽃이 진 자리에 다음 생의 어린 꿈이 자라고 있다
한 꽃이 피고 지고 그 꽃이 진 자리 들여다보게 된 시간 까지를 흘러오는 동안
내 정신의 안과 밖
끊임없는 새들이 둥지에서 태어나고 푸른 하늘로 날아 올랐다
그동안 내 귀밑머리도 하얗게 흘러왔으리니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
꽃이 질 무렵 올라오는 노루귀 새 잎새
흰 솜털 보송보송한 모습 꼭 노루귀를 닮았다
나도 이렇게 솜털 보송거리던 나이가 있었으리
그렇듯 나 이제 검은 머리 새하얀 불귀의 시간
잊어야 할 일들이 많다 노여움은 자주 오고
살아 있는 일은 한갓 덧없는 꿈같다
봄날, 내 곱고 붉은 사랑들은 일장춘몽이런가
언제였던가 그런 날이 있기나 했던가
까마득하다 가물거린다 아득한 어제다
한때 한 포기의 풀이라면 그 풀의 극점, 꽃처럼 살고자 했으나
줄기라면 잎새라면 아니 땅속 뿌리라면 또한 어떠리
모든 것들의 순간순간 저마다 극에 이르지 않은 것들
어디 없으리 꽃 피우고자 했으나 새순이 뽑힌들,
어린 봉오리로서 세상을 다한들 그들의 한때
아름답고 꼿꼿하지 않은 날들 어찌 없었으리
무수한 날들이다 그 안에 아직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너 무엇에 사로잡혀 있느냐
흰 노루귀꽃 한 송이가 봄날의 하늘을 건너고 있다
흰 노루귀꽃 한 송이가 흘러가고 있다
시집『적막』창비 2005년
- 1957년 전남 법성포 출생. 1984년<시인>으로 등단.
시집<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풀여치의 노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산문집<작고 가벼워질 때까지><꽃이 진다 꽃이 핀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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