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재봉사
─잠망경
- 김민철
꽃이 어김없이 피어나오는 사월의 벚나무는 공중 정원을 엿보는 잠망경이다 눈길이 가는 곳으로 조금씩 몸이 쏠린다
어떤 나무가 길 중앙에 뿌리를 박고 꽃그늘을 세운 적이 있다 하늘을 깊숙이 들여다보다 그만 시력을 잃었다 눈이 먼 나무는 마른 가지만 무성했다
나무 한 그루가 죽어나갈 때마다 내 속은 검게 타들어 갔다 사람들은 검게 그을린 자리를 밟지 않고 돌아갔다 그때부터 내 주위에 둥근 길이 생겼다, 나는 흙이었으므로
낮은 돌담에 둘러싸여 공중의 일들을 잡초 뿌리에 감아 두었다 그러나 겨울마다 찾아오는 함박눈 탓에 머릿속에 그린 공중 풍경은 다시 백지로 되돌아갔다
늦은 봄날, 잠깐 맴돌던 자리에서 검은 꼬리깃털에 버찌 하나를 숨겨 온 새가 있었다 나는 버찌를 새 대신 품었다 버찌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날개 가지를 펼치는 법을 학습관 벚나무는 자랐다 저공 비행으로 날아가는 꽃송이들, 사람들의 옷소매마다 분홍 향기 그림자를 놓고 다녔다
그리고 오늘 나는 더 이상 하늘 깊숙한 풍경을 탐하지 않는다 낮게 깔리는 공중 정원만을 생각한다 벚나무 잠망경은 어느덧 꽃잎으로 떨어져 내 품으로 스며들고
『문학청춘』2012년 봄호
- 1981년 서울 출생.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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