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의 오솔길/ 변두리 시

라쿠시샤* 외 4편

폴래폴래 2011. 11. 22. 13:51

 

 사진:라쿠시샤

 

 

 

 라쿠시샤[落枾舍]*   외 4

 

 

 

 삼나무 숲속의

 첫 만남이 침묵 끝에 매달려 서늘하다

 꽃등 같은 홍시의 심지만 붙들고 있는 하늘이

 내려오는 가지마다 익어간 감은 보이지 않고

 태어난 자리부터 다른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

 

 숙취의 목마름은 대통을 타고 내린

 빛바랜 물방울로

 젖은 머리는 긴 생각을 털어낸다

 무심한 한숨 힘겹게 내뱉는 홍매는

 흰 딱지 두텁게 덧칠할 사연을 감추었다

 

 뭉텅뭉텅 잘린 손목 끝 잔가지에

 오두방정을 떠는 박새의 안내를 받는다

 이내 향내로 가득한 마당에서

 이끼가 덮은 감나무의 몸통으로 이 집의 내력을 읽는다

 

 갈대가 가지런한 천장의 묵은내

 툭툭 털어 한 웅큼 삼키면

 집 안에 떠돌던 정적이 입안에 고여 든다

 

 집주인의 찻물 끓이는 나른함이

 한곳의 정적을 깨우며 머무러지 않는

 자유를 나는 맛보았다

 고즈넉한 자유가 깃든 바쇼의 방,

 휴식을 내가 훼손했는지

 가끔 뒤돌아 눈이 마주친 담장을 보며 떠난다

 

 

 * 라쿠시샤:교토에 있으며 바쇼 시인이<사가일기>를 집필했던 곳.

 

 

 

 

 호화반점

 

 호화반점에 이끌려 검버섯 손등이

 맛을 길게 끌어올리는 우리의 점심시간

 건더기 서로 건져주며 소소소 웃는다

 앞치마 두른 종업원이 무시하는 투의 몸짓으로

 가위를 들고 지겨운 듯 그릇 속의 맛을 오려낸다

 

 저 어린아이가 상처 입지 않은 손으로

 생의 첫 식사처럼

 숟가락으로 잘도 떠 먹는다

 바라보는 것도 배부른 짜장면 묻은 볼,

 혀까지 먹은 줄 알고 아이의 입을 벌려 본다

 

 내 인생의 보폭은 전족한 중국 여인처럼

 뒤뚱거린 어느 날

 쉰내를 맡은 얼굴로 미소 지었을 뿐

 텅빈 가슴에 남은 연탄 화덕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게 앙다물며 양파 한쪽 입에 넣는다

 

 까맣게 탄 숭늉 맛처럼

 하나의 종이컵을 한 모금씩 번갈아 마시는

 초로初老의 묵은내가

 황금가루를 뿌리는

 천사의 요술봉처럼 찬란하다

 

 창밖은 산자고 꽃잎 같은 봄빛이

 당신에게 서서히 번지고 있다

 헌신한 다음 말할 수 없는

 가슴의 울림처럼.

 

 

 

 체인징 파트너*

 

 

 굳이 옆자리다

 고집스러움이 여전한

 그녀의 동공에 박힌 울음소리

 흐느끼는 것처럼

 스치는 매끄러운 치마의

 냉기가 나의 손을 잡았다

 서로를 읽어가는 시간

 

 같은 벽을 쳐다보며

 다른 생각은 한쪽 귀만 알고 있다

 말이 없으니 들을 수 없는

 빛바랜 액자의

 잘라버린 귀 하나씩

 동굴로 가져간다

 캄캄한 카푸치노 향

 실내를 경쾌하게 바꾸는 맛을

 선택하라며 맡긴 체인징 파트너*

 

 고집스런 이면을 짐작하지만

 그녀는 홍어에 막걸리를 마신다

 그리고 나는

 썩지 못한다는 지난 세월을 받아 적었다

 같이 죽지 못하지만

 같이 살지도 못하는

 서로에게 나는 천적이었다

 

 

 *체인징파트너 Changing Partners:Patti Page노래.

 

 

 

 설마중

 

 

  아직 보이지도 않는 바다가 먼저 반기고 대이동의 긴 행렬은

시작되는 거다 아홉 시간 달린 차창으로 벌써 와 있는 상쾌한

바다내음이 펼쳐졌다

 

  싱싱한 뼈꼬시 한 접시에 눈을 흐리며 뼈의 아픔도 잠시 내가

받았거나 준 뼈도 고스란히 다 만나는 곳이다 무청 말라가는 풋

내와 청국장 끓는 잔소리가 있다 등줄기에 노린내가 나게 두들

켜 맞는 찰떡이 기다리는 그믐밤이다

 

  마루 위에 모셔둔 새 운동화를 잃을까봐 조바심하며 잠 못드

는 밤, 등대같이 밤새 뒤척이며 설레던 첫사랑이 생각난다 양갈

래 머리가 출렁이는 고향의 밤이다

 

  촛불을 켰나요 향을 사르고 술잔을 올립니다 세뱃돈 대신 문화

상품권을 줘도 괜찮아요 주윤발의 권총이 극장에서 기다리고 있

을테니까요 그러니까 공손히 절합니다 나일론 양말이 매끄럽군요

 

  면양말과 나일론양말의 차이, 고무신과 운동화의 차이, 물빠지

는 옷과 모직옷의 차이를, 아니면 입 닦고 넘어가는 어머니의 설

움을 안고 책상 밑에서 울고 있는 내 모습을 잊지 못하지 그래도

그때처럼 서러운 나는 없다

 

 

 남체* 마을

 

 

  신들과 함께 살며 만년설의 시린 물을 야크와 나눈다 너가 내 몸

을 필요할 때 잘 알듯이 손쉽게 쓸 수 있는 내 발처럼

 

  나는 가끔 설산의 손목을 꼭 쥐고 내 방으로 끌고 온다 온통 황금

빛으로 도배되는 쪽문으로 눈이 부신 것은 새벽 탓이다

 

  질리게도 파란 하늘은 젊은 아낙이 파묻힐 정도의 땔나무를 지고

간다 이마의 멜빵이 탱탱하다 나무시장 한켠에서 퉁퉁 불은 젖을

달고 있는 맑은 눈을 본다

 

  바람의 뒤에 서서 휘어진 밭둑을 천천히 따라갔다 어디선가 탱자

꽃 향내가 먼 고향을 떠올렸을 뿐 그곳에선 아무것도 그리워 질 수

없었다

 

  금빛 물드는 아침의 울림, 바위 쪼개는 망치에 흩어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돌벽돌 한 장 한 장 만드는 어린 부부의 멍든 손, 신발이

없는 짐꾼의 움츠러드는 맨발,

 

  아직 꺼지지 않는 백열등 아래 도란도란 깨어나는 남체, 나는 잊

혀지지 않는 생각을 되뇌인다

 

 

 

 *남체Namche:3,440m. 네팔 쿰부 히말라야 지역에 셀파족이 살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의 남체시장은 7일장이 열린다.

 

 

 

 

  『문예사랑』2011년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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