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우리들의 진화 / 이근화

폴래폴래 2010. 9. 15. 01:08

 

 

  사진:네이버포토

 

 

 

  우리들의 진화

 

                                 - 이근화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 발을 사랑해

 

 열 개의 손가락을 오래 사랑했다

 고부라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내 몸의 물은 내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왔다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오래 사랑했다

 

 

                    *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잡아먹는

 프레스기(機)의 진화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동그라미가 되어 간다

 

 긴 손가락으로 긴 손가락을 잡으면

 더 큰 동그라미들이 태어날까

 더 많이 태어났다 오래 죽어갈 수 있을까

 

 천장 위에 쌓이는 먼지들의 고고한 자세로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손을 모은다

 내 몸을 엉망으로 기억하는 이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한다

 

 

                       *

 

 우리는 일어나서 웃었다 나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나는 점점 더 물렁해지며 아무 냄새도 피우지 않는다

 외로운 자들이 자꾸 명랑해지는 이유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

 말이 없고 불만이 없는 자들이 사라질 미래를 향해 걸었다

 

 저 나무를 들어 올리면 몇 채의 집이 쓰러질까

 저 산을 뽑아낼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았다

 

 직선으로 내리는 비는 본 적이 없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돌고

 우리는 안전하게 다시 웃었다

 

 

 

 

  시집『우리들의 진화』문지 2009

 

 

 

 

  시인의 뒷표지 글

 

 새로 쓴 시가 먼저 쓴 시보다 더 ‘멋진’ 당신에게 배달되는 것은 아니다.

 

 계단은 없다.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면.

 

 아직 그 자리에. 지루하게 뭉개고 앉아서. 우리는 천국의 실험. 밝고

 환한 혓바닥이 쓰윽 우리를 핥을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도 좋은가.

 

 

 

 

 

  -1976년 서울 출생. 단국대 국문과, 고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4년『현대문학』등단

    시집<칸트의 동물원><우리들의 진화>

    윤동주상 젊은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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