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부뚜막 / 장석남

폴래폴래 2010. 9. 14. 11:52

 

 

 사진:네이버포토

 

 

 

  부뚜막

 

                         - 장석남  

 

 

 

 부뚜막에 앉아서 감자를 먹었다

 시커먼 무쇠솥이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솥 안에 금은보화와도 같이 괴로운 빛의 김치보시기와

 흙이나 겨우 씻어낸 소금 술술 뿌린 보리감자들

 누대 전부터 물려받은 침침함,

 눈 맞추지 않으려 애쓰면서

 물도 없이 목을 늘려가며 감자를 삼켰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감자를 삼킨 것인지

 무쇠솥을 삼킨 것인지

 이마 위를 떠도는 무수한 낮별들을 삼킨 것인지

 

 눈물이 떨어지는 부뚜막이 있었다

 어머니는 부뚜막이 다 식도록, 아궁이 앞에서

 자정 너머까지 앉아 있었다 식어가는 재 위의 숨결

 내가 곧 부뚜막 뒤의 침침함에 맡겨진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나는 가만히

 어머니의 치마 끝단을 지그시 한번 밟아보고 뒤돌아설 뿐이었다

 

 마당 바깥으로 나서는 길에 뜬 초롱한 별들은

 모든 서룬 사람의 발등을 지그시 누른다는 것이

 이후의 내 상식이 되었다 그로부터

 

 천정이 꺼멓게 그을린 부엌 찬 부뚜막에 수십년을 앉아서 나는

 고구려 사람처럼 현무도 그리고 주작도 그린다

 그건 문자로는 기록될 수 없는 서룬 사랑이다

 그것이 나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학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시(詩)로 알고 그리고 있다

 

 

 

 

 

  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2010

 

 

 

 

  시인의 말

 

   춘천휴게소 뒤편 산등성이였다. 바람이 잣나무를 밀어

흔들고 있었다. 주변이 모두 헌걸스러웠다. 그늘에서 한 남

자가 처음 보는 악기를 안고 앉아 줄을 고르고 있었다. 팔

이 길어 저편으로 갔다가 오듯 하였다. 한나절이나 계속되

었다. 줄 하나하나마다에서 서로 다른 빛이 떨리는 듯했다.

 몇개인지는 모르는 현이 모두 조율되었고 저녁이었다. 어

둠은 맑았으나 두터웠다. 그 사람의 연주인 양 더듬더듬 산

등성이 아래에서까지 별이, 어둠이 빛났다.

 

   그 악기의 이름이 혹 시였을까? 그가 조율하던 것이 혹

사랑이었을까?

 

  나는 지금 정작 그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도 애매하며

그가 조율하던 것이 악기였는지 비루한 인생이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 풍경이 선명할 뿐. 세상에서 가장 긴 하

루였다.

 

   오년 만에 여섯번째 시집을 낸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간격이 늪만 같다. 늪을 건너기란 쉽지 않다.

 

                                                        이천십년 팔월

          원주 토지문화관 귀래관에서 장석남 묵묵……

 

 

 

 

 

 

   - 1965년 인천 출생.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산문집<물의 정거장><물 긷는 소리> 등

      김수영문학상,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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