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이정록 시 몇 편

폴래폴래 2010. 4. 21. 11:14

 

 

 

 

 

 

  나무도 가슴이 시리다

 

                                       - 이정록 

 

 

 

 

 남쪽으로

 가지를 몰아놓은 저 졸참나무

 북쪽 그늘진 둥치에만

 이끼가 무성하다

 

 아가야

 아가야

 미끄러지지 마라

 

 포대기 끈을 동여매듯

 댕댕이덩굴이

 푸른 이끼를 휘감고 있다

 

 저 포대기 끈을 풀어보면

 안다, 나무의 남쪽이

 더 깊게 파여 있다

 

 햇살만 그득했지

 이끼도 없던 허허벌판의 앞가슴

 제가 더 힘들었던 것이다

 

 덩굴이 지나간 자리가

 갈비뼈를 도려낸 듯 오목하다

 

 

 

  시집『의자』

 

 

 

 

  마지막 편지

 

                           - 이정록

 

 

 

  가지를 많이 드리웠던 햇살 쪽으로 쓰러진다. 나무는 싹눈과 꽃눈이 쏠려 있던 남쪽으로 몸을 누인다. 한곳으로만 내닫던 몸과 마음을 잡아당기려 나의 북쪽은 한없이 졸아들었다

 

  이제 하늘 가까웠던 잔가지와 수시로 흔들리던 그늘과 돌아올 새봄까지 다 가지고 간다. 그루터기는 데리고 갈 수 없어 비탈에 남겨 놓는다. 멍하니 하늘 한가운데만 올려다볼 나이테, 그 외눈에 오래도록 진물 솟구치리라. 거기부터 썩어가리라

 

  네 눈길 없이는 다시는 싹 나지 않으리라

 

 

 

  시집『제비꽃 여인숙』

 

 

 

 

  물소리를 꿈꾸다

 

                                  - 이정록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 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 양

 맘껏 날아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울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시집『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풋사과의 주름살

 

                                     - 이정록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塔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落果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놓는다

 식탁에서 냉장고 위로, 다시

 세탁기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어디로 갔나

 몸 안을 비워 단물 쟁여놨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內部로 가는 길이구나

 鳶 살처럼, 內面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시집『풋사과의 주름살』

 

 

 

 

  무우

 

                          - 이정록

 

 

 

 

 헐값의 무우를 파묻는다

 저장이란 희망을 갈무리하는 것이지만

 이제 잊어야 한다

 삽날에 부딪치는 돌멩이의 눈에서 불꽃이 인다

 구덩이를 각 잡아 팔 필요도 없다

 경운기에서 쏟아지는 자세대로 썩어문드러진 녀석들

 다시 거름이 되거라 또 돌아서서 잊어야 한다

 

 시래기 얼어붙는 무우밭

 염생이가 겨울을 묶어 돌리고 있다

 배고픈 울음 밑에

 숨죽인 채 슬플 무우야

 속 쓰리게 하는 것이 너뿐이 아니여

 동짓달 기나긴 가슴이 탄다, 술 깨오는

 위장벽에 따갑게 싸래기 뿌려

 억지로 누르고 살던 하얀 네 얼굴

 동치미 국물이나 생무우로 떠오르게 한다

 

 별빛을 안고 잠든 눈 내린 텃밭

 깊이 접어두었던 절망 위에 곡괭이를 꽂는다

 맨발의 고무신 속으로 개 짖는 소리 차가운 밤

 꽁꽁 언 땅에서 빛 한 줄기 만나지 못했을 무우야

 신통하다 오락 솟아오른 싹

 깜깜한 짓눌림 속으로 버림받은 너희들

 끼리 어울려 피운 싱싱한 싸움이여

 염생이처럼 슬피 울며

 언 시래기로 겨울을 나는 우리에게

 뿔이 되어 안긴다

 

 

 

 

  시집『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공주사대 한문교육과 졸업

    1989년 대전일보,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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