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몽해항로 2 / 장석주

폴래폴래 2010. 4. 8. 12:21

 

 

 

 

 

  몽해항로 2

       ─흑해행   

 

 

                                   - 장석주

 

 

 

 잡풀들이 무너져 키를 낮추고

 들에 숨은 웅덩이들이 마른다.

 가을 가뭄은 길고 꿈은 부쩍 많아지는데

 사는 일에 신명은 준다.

 탕약이 끓는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옛날은 가고 도라지꽃은 지고

 간고등어나 한 마리씩 먹으며 살아도 되나.

 요즘 웬만한 길흉이나 굴욕은 잘 견디지만

 사소한 일에 대한 인내심은 사라졌다.

 어제 낮에는 핏물이 있는 고기를 씹다가

 구역질이 나서 더 먹지를 못했다.

 비루해, 비루해. 남의 살을 씹는 거,

 내 구강(口腔)에서 날고기 비린내가 난다.

 이슬람이라면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할 텐데,

 금식은 얼마나 순결한가.

 안성 시내에서 탄 죽산행 버스 안에서

 취한 필리핀 남자 두 명을 만났다.

 안성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겠지.

 황국이 피는 이 낯선 땅에서 술을 마시며

 헤매는 저 이방의 노동자들!

 

 기온이 빙점으로 내려가는 밤

 서재에서 국립지리학회보를 들여다보는데

 뼛속의 칼슘들이 조용히 빠져나간다.

 지난해 이맘때 자주 출몰하던 너구리가

 올해는 보이지 않는다.

 하천 양쪽으로 콘크리트 옹벽을 친 탓일까.

 배나무에서 배꽃 필 무렵

 잉잉대던 벌들도 올해는 드문드문 보인다.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가창오리들이 꾸륵꾸륵 우는 소리 들으니

 집 아래 호수의 물이 어는 모양이다.

 꿈속에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를 탄다.

 누군가 흑해행 버스라고 했다.

 검은 염소들이 시끄럽게 울어 댄다.

 한 주일쯤 달리면 흑해는 닿는다고 했다.

 나는 참 멀리도 가는구나, 쓸쓸한 내 간을 위하여

 누가 마두금이라도 울려 다오,

 마두금이 없다면 뺨이라도

 철썩철썩 때려 다오, 마두금이 울지 않는다면

 나라도 울어야 하리!

 

 

 

 

  시집『몽해항로』민음사 2010

 

 

 

 

  -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붉디붉은 호랑이><절벽>등

     산문<새벽예찬><취서만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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