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해항로 2
─흑해행
- 장석주
잡풀들이 무너져 키를 낮추고
들에 숨은 웅덩이들이 마른다.
가을 가뭄은 길고 꿈은 부쩍 많아지는데
사는 일에 신명은 준다.
탕약이 끓는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옛날은 가고 도라지꽃은 지고
간고등어나 한 마리씩 먹으며 살아도 되나.
요즘 웬만한 길흉이나 굴욕은 잘 견디지만
사소한 일에 대한 인내심은 사라졌다.
어제 낮에는 핏물이 있는 고기를 씹다가
구역질이 나서 더 먹지를 못했다.
비루해, 비루해. 남의 살을 씹는 거,
내 구강(口腔)에서 날고기 비린내가 난다.
이슬람이라면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할 텐데,
금식은 얼마나 순결한가.
안성 시내에서 탄 죽산행 버스 안에서
취한 필리핀 남자 두 명을 만났다.
안성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겠지.
황국이 피는 이 낯선 땅에서 술을 마시며
헤매는 저 이방의 노동자들!
기온이 빙점으로 내려가는 밤
서재에서 국립지리학회보를 들여다보는데
뼛속의 칼슘들이 조용히 빠져나간다.
지난해 이맘때 자주 출몰하던 너구리가
올해는 보이지 않는다.
하천 양쪽으로 콘크리트 옹벽을 친 탓일까.
배나무에서 배꽃 필 무렵
잉잉대던 벌들도 올해는 드문드문 보인다.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가창오리들이 꾸륵꾸륵 우는 소리 들으니
집 아래 호수의 물이 어는 모양이다.
꿈속에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를 탄다.
누군가 흑해행 버스라고 했다.
검은 염소들이 시끄럽게 울어 댄다.
한 주일쯤 달리면 흑해는 닿는다고 했다.
나는 참 멀리도 가는구나, 쓸쓸한 내 간을 위하여
누가 마두금이라도 울려 다오,
마두금이 없다면 뺨이라도
철썩철썩 때려 다오, 마두금이 울지 않는다면
나라도 울어야 하리!
시집『몽해항로』민음사 2010
-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붉디붉은 호랑이><절벽>등
산문<새벽예찬><취서만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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