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팔만대장족경 / 유홍준

폴래폴래 2010. 4. 6. 11:34

 

 

    사진:네이버포토

 

 

 

  팔만대장족경

 

                             - 유홍준 

 

 

 

 고향집 장독대에

 이제는 다 채울 일 사라져버린 서 말가웃 장독 하나가 있다

 

 흘러내린 바지춤을 스윽 끌어올리듯 무심코 난초 잎을 그려넣은

 장독 앞에서 팔만개의 족적을 본다

 반죽을 다지고 또 다졌을 팔만개의

 발자국소리를 듣는다

 

 누가 한 덩어리 흙 위에

 저만한 발자국을 남겨

 제 발자국을 똘똘 뭉쳐 독을 짓는단 말인가

 

 천도가 넘는 가마 속에서

 발갛게 달아올랐을

 발자국이여

 뒤꿈치여

 

 단 한번이라도

 저 독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나는

 대시인이 됐을지도 몰라

 

 간장이 익어 나오는 걸 봐

 不正이라고 못 익히겠어 천벌이라고 못 익히겠어

 

 콧물 훔치듯 난초 잎을 올려 친

 팔만대장,족경이여

 

 

 

 

  시집『나는, 웃는다』창비 2006

 

 

 

 

  -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시와반시』신인상 등단.

    시집<喪家에 모인 구두들>

    시작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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