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내가 암늑대라면 / 양애경

폴래폴래 2009. 12. 25. 12:29

 

 

 

 

 

 

     내가 암늑대라면

 

                                           - 양애경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밤 산벚꽃나무 밑에서 네게 안길 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피나지 않을 만큼 한 입 가득 네 볼을 물어떼면

 너는

 

 만약 네가 숫늑대라면

 너는 알콜과 니코틴에 흐려지지 않은

 맑은 씨앗을

 내 안 깊숙이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해처럼 뜨거운 네 씨를

 달처럼 차가운 네 씨를

 날카롭게 몸 안에 껴안을 거다

 

 우리가 흔들어 놓은 벚꽃 둥치에서

 서늘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져

 달아오른 뺨을 식혀 줄 거다

 

 내 안에서 그 씨들이 터져

 자라고 엉기고 꽃피면

 (꽃들은 식물의 섹스지)

 나는 언덕 위에서

 햇볕을 쐬며 풀꽃들 속에 뒹굴 거다

 

 그러다 사냥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진 내 곁을

 네가 떠나버린다면

 그래서 동굴 안에서 혼자 새끼들을 낳게 한다면

 나는 낳자마자 우리의 새끼들을 모두 삼켜 버릴 거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겠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내 곁을 지키면서

 눈시울을 가느다랗게 하면서

 내 뺨을 핥을 거다

 

 후에 네가

 수컷의 모험심을 만족시키려 떠난다면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는

 다른 수컷의 뺨을 깨물 거다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는 거니까

 

 내 꿈은 무리에서

 가장 나이 들고 현명한 암컷이 되는 것

 뜨거운 눈으로 무리를 지키면서

 새끼들의 가냘픈 다리가 굵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나는 거기까지 가는 거다

 이 밤 이 산벚꽃나무 밑둥에서 출발하여

 해 지는 언덕 밑에 자기 무리를 거느린

 나이든 암컷이 되기까지.

 

 

 

          시집『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북인 2009

 

 

 

            - 1956년 서울 출생. 충남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공주영상정보대 영상문창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