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암늑대라면
- 양애경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밤 산벚꽃나무 밑에서 네게 안길 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피나지 않을 만큼 한 입 가득 네 볼을 물어떼면
너는
만약 네가 숫늑대라면
너는 알콜과 니코틴에 흐려지지 않은
맑은 씨앗을
내 안 깊숙이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해처럼 뜨거운 네 씨를
달처럼 차가운 네 씨를
날카롭게 몸 안에 껴안을 거다
우리가 흔들어 놓은 벚꽃 둥치에서
서늘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져
달아오른 뺨을 식혀 줄 거다
내 안에서 그 씨들이 터져
자라고 엉기고 꽃피면
(꽃들은 식물의 섹스지)
나는 언덕 위에서
햇볕을 쐬며 풀꽃들 속에 뒹굴 거다
그러다 사냥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진 내 곁을
네가 떠나버린다면
그래서 동굴 안에서 혼자 새끼들을 낳게 한다면
나는 낳자마자 우리의 새끼들을 모두 삼켜 버릴 거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겠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내 곁을 지키면서
눈시울을 가느다랗게 하면서
내 뺨을 핥을 거다
후에 네가
수컷의 모험심을 만족시키려 떠난다면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는
다른 수컷의 뺨을 깨물 거다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는 거니까
내 꿈은 무리에서
가장 나이 들고 현명한 암컷이 되는 것
뜨거운 눈으로 무리를 지키면서
새끼들의 가냘픈 다리가 굵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나는 거기까지 가는 거다
이 밤 이 산벚꽃나무 밑둥에서 출발하여
해 지는 언덕 밑에 자기 무리를 거느린
나이든 암컷이 되기까지.
시집『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북인 2009
- 1956년 서울 출생. 충남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공주영상정보대 영상문창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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