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다른 동네 / 김행숙

폴래폴래 2009. 4. 25. 23:03

 

 

 

 

 

 

            다른 동네      / 김행숙

 

 

 폐가 되지 않는다면

 댁의 화장실을 좀 써도 되겠습니까

 폐가 되지 않는다면 흥겹게 먹고 마셔도 되겠습니까

 저녁부터 골목이 깊어집니다

 다른 동네까지

 오목한 거지들이 손을 오므리고 지나갑니다

 오목한 손, 저 손이

 줄줄 흘리는 것들을 따라

 화들짝 놀라서 피하는 사람들을 따라

 좁은 길이 생기고

 

 양쪽으로 갈라진 머릿결 같은 무리들이

 눈빛을 잃고

 잃어버린 것들이 공중에서 얼어붙습니다

 거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불을 켤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인님

 백 년 전의 하인들이 등잔을 받쳐 들고 계단을 올라갑니다

 백 년 동안

 영원히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비명을 질러도 되겠습니까

 마음이 없어져도 좋습니다

 우리는 금세 공기 중에서 녹으니까

 

 꿈에서 꿈으로 이동하듯

 부드러운 우리는 보이지 않으니까

 시간처럼

 우리를 쫓아오면 금세 다른 동네이니까

 험악한 얼굴로 돌아서도 되겠습니까

 먼저 개가 짖습니다

 사나운 개하고 친해지면 친구가 많이 생깁니다

 놀랄 만한 일들은 연속해서 일어납니다

 우리 아이가 없어졌어요!

 밤중에 대소동이 벌어집니다

 

 

 

              - 1999년 '현대문학'등단.시집<사춘기><이별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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