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낯선이의 불로그에서
팬티를 삶으며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화은
한결같이 여성스럽다
여자스럽다
다소곳 오래된 연분홍
먼 하늘에 자욱하던 오동꽃
치자 빛은 참 귀하게 만난다
지난봄에 산 팬티는 자잘한 들꽃 무늬였다
꽃 핀 들판 하나를 온통 꿰입고 풀꽃처럼 잠시 순진무구했다
남자를 아주 모르는 여자처럼
아직도 내가 면 팬티를 고집하는 이유는
삶아 빨 수 있기 때문인데
폭폭 삶아
내가 껴입었던 여자의 흔적을 왜, 굳이, 지우려 하는지
황제를 호리기 위한 후궁처럼 팬티 속에 예쁜 여우 한 마리
숨긴 것도 아닌데
평생 흰 팬티만 입으시던 어머니도 오래오래
죄 없는 흰 색을 삶고 또 삶았다
독한 양잿물까지 넣어 지워야 했던 어머니의 여자, 여자들
흰색은 삶아도 흰색이었다
수만 번 삶아도 어머니는 아직도 내 어머니이듯
나는 딸이 없으니 이 대물림도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연분홍도 오동꽃도 자잘한 풀꽃들도 훌훌 팬티를 벗어 던지고
내미치마로 거리를 활보할까
시방(十方)에 여자의 달근한 생 향기 가득하겠다
『포지션』2018년 겨울호
경북 진량 출생. 1991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이 시대의 이별법><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절정을 복사하다><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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