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하마비 / 정혜영

폴래폴래 2017. 3. 31. 17:09




                 경남 고성 옥천사. 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하마비



                                           -정혜영


  이제부터 혼자 걸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여럿이었죠, 겹겹으로


 어둠을 응시하며 어둠이 되어간

 그동안의 오해가 이해였다는

 아버지의 감옥에서 문장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이야기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다가

 미군부대 정문 앞에서 푸른 신호등이 명멸하던

 어둠의 정면과 마주칩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이 캄캄합니다

 하얀 말이 기다리고 하얀 말이 쳐다보고

 혼종의 오해가 시가 됩니다

 목이 긴 장화는 혼자 걷기 좋습니다


 어둠 속을 걸어야 합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 복잡한 침묵을 닮았습니다


 철학자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까만 폴로셔츠는 거절의 말을 고르기에 적당한 포즈


 철학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무는 것

 몸은 여기 있고

 환승역은 아무에게나 말을 겁니다


 효창공원, 효창공원, 경의선으로 갈아타야 할 분은 이번 역에서 내리셔야 합니다

 갈아타야 할 말은 침묵입니다


 환승역의 스피커가 들리지 않습니다

 목소리는 공중으로 흩어지고 사라져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오늘 밤은 그만 걷고 싶습니다

 물집 가득한 발목 두 짝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는 중입니다.




 서정시학 2017년 봄호



 -2006년『서정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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