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저녁의 운명 / 이병률

폴래폴래 2013. 10. 8. 11:14

 

 

 

 

 

 

 

  저녁의 운명

 

 

                                       - 이병률

 

 

 

 저녁 어스름

 축대 밑으로 늘어진 꽃가지를 꺾는 저이

 

 저 꽃을 꺾어 어디로 가려는 걸까

 

 멍을 찾아가는 걸까

 열을 찾아가는 걸까

 꽃을 꺾어 든 한 팔은 가만히 두고

 나머지 한 팔을 저으며 가는 저이는

 

 다만 기척 때문이었을까

 꽃을 꺾은 것이

 그것도 흰 꽃인 것이

 

 자신이 여기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소리치려는 것일까

 높은 축대를 넘겠다며 가늠을 하는 것일까

 

 나는 죽을 것처럼 휘몰아치는

 이 저녁의 의문을

 어디 심을 데 없어

 그만두기로 한다

 

 대신 고개를 숙이고 참으며 걸으려 한다

 

 아름다움을 이해하려고 할 때나

 아름다움을 받아내려고 할 때의 자세처럼

 분질러 꺾을 수만 있다면

 나를 한 손에 들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운명이라도 밀어야 한다

 

 

 시집『눈사람 여관』문지 2013.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바람의 사생활><찬란>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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