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검은 글씨 / 유희경

폴래폴래 2012. 1. 10. 11:24

 

 

        검은 글씨

 

                                     - 유희경

 

 

 1.

 흰 벽을 지우고 그림자가 길어진다 사라진다

 노란 불빛 밤 언어 구멍을 채우고 다듬는

 색은 원래 검다 눈은 초라히 흔적을 고정한다

 공포를 예비한 채 움직이는 한 떼 사람들, 사이

 바람이 지나간다 흐느낀다 망설인다 돌아온다

 침묵이 고요가 아니듯 정적이 소리를 흔들 듯

 부모가 아이를 재운다 어둠이 무서워, 무서워

 未來가 구석으로, 소리 없이, 몰려가고 있다

 

 2.

 그때, 유령을 보았다 검은 글씨로 밤을 눌러 적던

 지나간 밤의 일 몇몇 개의 낱말들 겨울을 불러

 바깥이 얼어붙고 노크를 하듯 어둔 방이 남겨져

 노랫소리 오래 잊고 있었으니 미처 알지 못했던

 새하얀 백지들 신음을 받아내고 있다 그 사람은

 죽었다 그의 하얀 손가락도 붉디붉은 혓바닥도

 사라지고 없는 것, 모두 거짓이다 남아 있으라

 일생이 지나간다 느려지고 멈추고 떨어지는 시계

 어둠이 두 눈을 감는다 아직 더 남아 있다

 

 3.

  텅 빈 잠, 당신, 눈동자의 안개, 소리, 당신, 쓰다가 그만둔, 설명 그리고 당신, 눈이 어두워져간다, 묻는다, 당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앞과 뒤, 어떤 것이, 이상한가, 괴로운가, 앎과 무지, 어디서, 발소리가 다가오는가, 길고 무거운 것을 끌고서, 당신, 잠의 바닥을 비추고 있는 희미한, 불빛, 내심, 당신의

 

 4.

 온다, 아침은, 남김없이, 부수어놓을 것이다

 방문이 열리고 닫힌다 손끝이 흔들린다

 뜨거움이 불러오는 오한 얼굴을 가린 후

 중얼거린다 조금만 더 단호해질 수 있다면,

 낡은 셔츠처럼 온통 닳은 것투성이 색과 빛이

 바래고 있다 죽은 것들의 시간이, 시작된다

 모두 되살아나 움직인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같은 방식으로 아직 나는 그가 남겨놓은

 

 

 

 

 웹진『발견』2011년 12월호

 

 

 

 - 1980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졸업.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오늘 아침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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