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음악
- 김혜순
바다는 지쳤어요
파도치기 지쳤어요
왔다가 갔다가 그러는 거 이제 그만 하고 싶었어요
축축한 바람이 온몸을 둘러싸고 놓아주지 않는 거
지구는 둥글어서 내 품도 둥글어서
내일인지 어제인지
똑같은 세월이 왔다 갔다 하는 거
똑같은 등대가 쉴 새 없는 밤낮처럼 커졌다 꺼졌다 하는 거
저 머리숱 적은 섬의 발뒤꿈치 그 짜디짠 소금 맛을
혓바닥 속속들이 모두 모두 기억하는 거
이제 그만 지쳐버렸어요
너를 멀리 데려가줄게 속삭여놓고는
언제나 사랑만 하고 돌아가는
저 태양이 밤마다 몸속으로 기우는 거
모두 모두 지쳤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긴 이야기는
시바가 제 아내에게 들려준 70만 댓귀의
이야기의 바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듣기만 하는데 500일이 걸린대요
시바의 아내는 얼마나 지겨웠을까요?
밤마다 체위를 바꿔가며 듣는 그 이야기
저 햇살을 가닥가닥 풀어
해가 뜨는 문양의 담요를 짜서
이제 그만 재워주고 싶었어요
해가 지는 수평선을 도르르 말아
붉은 장미 한 송이 그녀에게 갖다 주고도 싶었어요
바다는 지쳤어요
파도치기 지쳤어요
그래서인지 오늘 밤엔 내 방까지 몰려 들어와
찬 물결 시린 몸으로 왔다가 갔다가 그러면서 울었어요
나는 그만 저 바다가 너무나 불쌍해서
웅크린 몸 따뜻한 눈물 한 방울로
그 푸른 파도를 꼭 껴안아주었어요
시집『한 잔의 붉은 거울』문지 2004
- 1979년『문학과지성』등단.
시집<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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