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그녀의 검은 봉지 / 석미화

폴래폴래 2010. 1. 31. 18:06

 

 

 

 

 

 

 

  그녀의 검은 봉지

 

                                 - 석미화

 

 

 

     1

  난 화분을 깨뜨렸다 잎마름병에 걸린 잎 닦다가 줄기 쑥 딸려 나오며 깨져버렸다 영양제 꽂아두고 노란 액 흘러드는 걸 몇 주 지켜보았다 링겔병 꽂고 드러난 뿌리, 너무 가벼워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를 안아 누일 때도 그랬다 몸이 굽어진 이유를 알았다 나는 철 침대 이불 밑으로 삐져나온 그녀의 발가락 만지고 또 만졌다

 

     2

  그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시집 간 딸 보러 온 먼 길,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 영정사진 같았다 몸에선 간장 냄새가 났고 손톱은 새까맣게 쪼개져 있었다 손에는 검은 봉지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3

  처음부터 그녀는 청승맞지는 않았다 두 봉지 오천 원, 짓무른 복숭아를 사지는 않았다 복숭물 뚝뚝 흘리며 그 자리서 무른 살 다 베어 먹지는 않았다 까만 손톱 밑까지 들어간 단물 빨아먹지는 않았다 떠리미로 신발자국 난 시퍼런 배춧잎 싸들고 오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구멍 숭숭 뚫린 봉지, 복숭아가 짓무르고 배추가 시드는 사이 그녀도 참 속 많이 버리고 살았다

 

     4

  주름투성이 검은 봉지,

 겹겹이 벗고 난 그녀 날아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 1969년 경북 성주 출생. 계명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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