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김수영
책을 한 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 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
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의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
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
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
지요.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시힘 25주년 기념 동인지.북인 2009
- 1967년 경남 마산 출생.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오랜 밤 이야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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