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지난 밤 / 김영미
폴래폴래
2019. 10. 13. 10:58
지난 밤
김영미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어두운 밤을 발견하라고 선생은 말했다
냉장고에 넣어둔 밤에 벌레가 생겼다
검은 비닐봉지 안은 잔별 같은 가루들로 가득했다
부드럽고 말량한 몸 어디에 칼을 지니고 있던 것일까
가장 차가운 곳에서 가장 따뜻한 몸이 꿈틀대고
그날의 교외선에서 남자는 밤 깎는 칼을 팔고 있었다
아무도 단단한 것을 벗겨내는 더 딱딱한 물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남자는 밤 같은 손등에 칼을 문질렀다 점점 밤이 환해지고 있었다
종일 밤을 주우러 다닌 엄마의 배낭은 어떤 밤으로 넘쳤을까
택배 상자는 하루라도 산을 헤매고 다니지 않으면 숨쉬기 힘들다는
엄마의 밤으로 고스란했다
아마도 가장 어두운 밤을 발견한 것 같다고 나는 선생에게 말했다
그 방이 머지않아 떠날 것 같다고도 했다
선생은 자꾸 살이 오르는 나의 밤을 경계하라 했다
시집『맑고 높은 나의 이마』아침달 2019년
1975년 양수에서 태어나 구리에서 성장. 서울시립대 철학과 졸업
2012년<현대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