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펜 뚜껑 / 이현승
폴래폴래
2016. 4. 5. 15:42
펜 뚜껑
- 이현승
가방을 잃어버렸다.
펜은 없고 펜 뚜껑만 남아서 내버렸는데
가방에서 펜이 나와 뚜껑을 찾으러 간 사이였다.
가방에 든 신용카드와 여권과 함께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펜 없는 펜 뚜껑처럼, 펜 뚜껑 없는 펜처럼
없어서 더 분명해지는 존재가 있다.
잃어버린 가방과 집시의 희미한 미소,
내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어디에서 왔냐와 무얼 하러 왔냐가
공연한 의심과 문책이 되는 순간들
증명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필사적으로 내가 되어야 하다니 불공평하다.
놀러 왔는데 테러하러 온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고
조그만 아시안은 그만 불칠절해지고 싶은데
경직된 미소는 난처한 의심만 만들어낸다.
뚜껑만 남은 펜처럼 없어서 있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어서 투어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나는 펜을 줄 테니 가방을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
테러범 같은 집시를 만나야 하고
여행은 반드시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일 수 밖에 없고
『리토피아』2016년 봄호.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2002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생활이라는 생각>
현재 계간<파란>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