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사과 / 유병록

폴래폴래 2015. 7. 15. 16:01

 

 

 

 

 

 

                  사과

 

 

                                                    - 유병록

 

   사과밭에서는 모든 게 휘어진다

 

   봄날의 약속이 희미해지고 한여름의 맹세가 식어간다 사과밭을 지탱하던 가을의 완력도 무력해진다

 

   벌레 먹듯이

   이제 내가 말하는 사과는 네가 말하는 사과가 아니다

 

   모든 게 어긋난다

   우리는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린다

 

   내가 사과를 건네도 네 손은 비어 있다

   농담을 해도 너는 웃지 않는다

 

   사과가 떨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거리로 아득해진다

 

   사과가 한 광주리의 향기가 쏟으며 썩어간다

 

   멀리 가지는 않고

   사과나무 말치에서 썩어간다 사이를 짐작하다 말을 잃은 자처럼, 그의 핏기 없는 입술처럼

 

 

 

   『현대시』2015년 6월호

 

 

 

    -1982년 충북 옥천 출생.2010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