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죽은 개를 기르는 사람은 / 안희연

폴래폴래 2015. 6. 28. 11:45

 

 

 

 

 

        죽은 개를 기르는 사람은

 

                                                        - 안희연

 

   손에 들린 사과를 깎는다 시작도 끝도 없이

   창밖에는 미수에 그친 여름이 있다

 

   그는 길을 내려 했다 깎을 수 없는 것을 깎으면서

   한 시간을 파묻으려 했다 사과는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누가 이 싸움을 시작했는가

   물을 찢고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차례로 흉상이 되어 간다

 

   토막 나 끊긴 길들

   사방이 벽이어서 지킬 수 있는 이름들

 

   내딛으려는 말보다 빠르게 계절은 겨울로 치닫고

   이제 폭설은 맨발을 요구한다 마지막까지 칼을 움켜쥐게 한다

 

   그는 언제부터 깰 수 없는 꿈에 들었는가

   살아남았다는 얼굴을 하고서

   비탈을 지날 땐 비탈의 속도가 되고

   밤을 견딜 땐 밤의 기둥이 되는

 

   칼의 기도가 자란다

   그럴수록 그가 깎여간다

   있지도않은 사과를 손에 들고

 

 

 

   『21세기 문학』2015년 봄호.

 

 

 

   -1986년 경기도 성남 출생. 명지대 문창과 박사과정 中.

     2012년<창작과 비평>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