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 김소연

폴래폴래 2013. 9. 26. 11:11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김소연

 

 

 먼 훗날,

 내 손길을 기억하는 이 있다면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줄

 시 한 수 미리 적으며

 좀 울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아래서

 실컷 좀 울어볼까 한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묵음으로 발음되도록

 언어의 율법을 고쳐놓고 싶어 청춘을 다 썼던

 지난 노래를 들춰보며

 좀 울어볼까 한다

 도화선으로 박음질한 남색 치맛단이

 불붙으며 큰절하는 해질 녘

 창문 앞에 앉아

 녹슨 문고리가 부서진 채 손에 잡히는

 낯선 방

 너무 늦어 너무 늙어

 몸 가누기 고달픈 어떤 때에

 사랑을 안다 하고

 허공에 새겨 넣은 후

 남은 눈물은 그때에 보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세상을

 베고 누워서

 

 

 

 시집『눈물이라는 뼈』문지 2009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가톨릭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3년<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극에 달하다><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