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추석 즈음 / 최영미
폴래폴래
2013. 9. 4. 12:57
추석 즈음
- 최영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할머니의 시어머니의 시어머니에게
절한 뒤에
망자들이 손도 대지 않은
떡과 과일을 먹고
내가 물려받을 조상의 역사를 설명하는
아비의 입가에 접힌 팔자(八字) 주름
쨍쨍한 가을볕을 피하려 나는 얼른 일어섰다
내가 물려받고 싶지 않은 유산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고
당신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
맏딸인 내가 관리할 무덤들을 둘러본다
망해가는 후손의 발목을 잡고 번창하는
그악스런 잡초들, 비석 위에 살아 있는
3대의 생몰연대를 휴대전화에 저장하고
가까운 그날에
당신 없이,
내가 앞장서 올라가야 할 언덕
길을 잃지 않으려,
저승 가는 번지수를 잊지 않으려
묘지 번호를 수첩에 적고
산을 내려오는
아버지와 딸.
팔십 세의 아비는 어느덧
중년의 딸보다 걸음이 빠르지 않다
시집『이미 뜨거운 것들』실천문학사 2013년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홍익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꿈의 페달을 밟고><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등 소설,산문집,번역서 등 간행.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