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 최영미

폴래폴래 2013. 6. 19. 16:16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 최영미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밟는다는 건

 웃고 떠들고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한 남자를 보낸다는 건

 뚜 뚜 사랑이 유산되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는 건

 편지지의 갈피가 해질 때까지 줄을 맞춰가며 그렇게 또 한시절을 접는다는 건

 비 개인 하늘에 물감 번지듯 피어나는 구름을 보며

 한때의 소나기를 잊는다는 건

 낯익은 골목과 길모퉁이, 등 너머로 덮쳐오는 그림자를 지운다는 건

 한 세계를 버리고 또 한 세계에 몸을 맡기기 전에 초조해진다는 건

 논리를 넘어 시를 넘어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뭉갠다는 건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1994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꿈의 페달을 밟고><돼지들에게> 등. 산문집,미술에세이, 장편소설,

   번역서 등이 있다. 2006년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