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 박정대

폴래폴래 2012. 12. 30. 11:22

 

 

 

 

 사진:네이버포토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에게

                                                                    -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 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지나가는 모든 것과 다가오는 그 모든 파도를

 나의 바다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시집『단편들』세계사 1997년

 

 

 - 1965년 강원도 정선 출생. 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단편들><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삶이라는 직업><모든 가능성의 거리>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