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한낮의 체위 / 정운희

폴래폴래 2012. 12. 14. 11:23

 

 

 

 

 

 사진:네이버포토(강물)님

 

 

 

              한낮의 체위

 

                                                      - 정운희

 

 

 

 손을 뻗으면 과자가 있고 만화책이 있다

 라면과 나무젓가락, 양말과 속옷, 모자와 우산

 나른한 사건 현장 같아서

 말캉해지다가 딱딱해지다가

 자주 사용되는 소화제처럼 치명적이다

 

 컴에서 쓰다 만 시를 꺼버렸다

 베란다는 삭제하기 좋은 곳

 목욕용 의자를 놓고 뒤돌아앉아

 등이 따끈거릴 때까지 기다린다

 집 나간 오빠가 돌아오기를

 마지막 계단이 완성되기를

 버려진 개의 파랑새이기를

 내가 나로부터 빠져나올 때까지

 

 멀쩡한 우주도 지루하고

 춤추지 않는 벌떼도 흥미 없다

 아이들은 거리를 떠도는데

 손발톱은 왜 이리도 잘 자라는지

 따듯한 햇빛으로 옮겨와 정리한다

 

 공중에 떠도는 이름

 이름을 구워먹을지 산채로 먹을지

 그도 아니면

 포르말린 왕창 넣어 유리관 속에 가두어 두고

 평생을 썩지 않게 바라볼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오후 3시에 걸려있고

 버티컬은 구름무늬를 막아버렸다

 

 손을 뻗으면 타성에 젖은 애인이 있고 바나나가 있다

 던져버린 브래지어와 안경과 비닐 봉투가

 번데기 만드는 누에 체위*를 닮아있다

 

 

   *영화'돈 록 다운(Don´t Look Down)대사

 

 

  - 열린시학 2012년 겨울호

 

 

 

  - 충북 충주 출생. 2010년<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