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분홍을 기리다 / 조용미

폴래폴래 2012. 6. 14. 08:26

 

 

 

 

 

 

 

 분홍을 기리다

 

                                      - 조용미

 

 

 

  산그늘 한쪽이 맑고 그윽하여 들었더니 거기 키 큰 철쭉 한 그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엷은 분홍빛 다섯장의 통꽃들 환하여 그 아래 잠시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지요

 

  그들의 이마를 어루만지니 열꽃이 살며시 번졌습니다

 

  이른 봄꽃들 지나간 봄 숲을 먼 등불처럼 어른어른 밝히고 있는 그 여린 분홍빛에 내 근

심을 슬쩍 올려 놓고 바라보아요

 

  실타래처럼 쏟아져 나온 열 가닥 꽃술은 바람이 없는데도 긴 속눈썹을 가늘게 떨고 있어

요 떨어진 분홍빛들은 가만히 그 자리에서 빛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아래 애기나리들이 연둣빛 솜 방석을 깔고, 내려온 분홍빛들을 받쳐주고 있습니다 나

는 애기나리들의 낮은 데 있는 그 마음을 받쳐줄까 하여 오래 고개 숙였지요

 

  내 앉은 나무 아래 분홍빛은 모여들어 봄은 또 이곳에 잠시 머뭇거립니다

 

  가까운 개울물 소리도, 산비둘기 울음도, 쓰러져 누워 푸릇푸릇 이끼를 껴입은 벚나무 푸

석한 가지들도 모두 저 꽃의 분홍을 기리기 위해 이 숲에 온 듯합니다

 

  저 고요한 분홍이, 숲의 물소리를 낮추고 있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어요 그 분홍

빛 아래서 당신은 또 한나절 나를 견뎠겠습니다

 

 

 

 

  시집『기억의 행성』문지 2011년

 

 

 

 

  - 1962년 경북 고령 출생. 1990년<한길문학> 등단.

    시집<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등

    김달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