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와도 그만 가도 그만 / 최서림

폴래폴래 2012. 6. 1. 18:54

 

 

 

 

 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와도 그만 가도 그만

 

                                     - 최서림

 

 

 

 덜거덕거리는 삶들이 올챙이처럼 오글거리는 비포장 삼거리

 벌겋게 녹슨 함석지붕의 화산집이 있었다.

 젓가락 장단에 코맹맹이소리로

 이미자 노래 청승맞게 불러 넘기던 화산댁,

 이정표 없어도 아무 문제없던 삼거리 같은 화산댁이 있었다.

 라디오 연속극 들으며 곧잘 훌쩍이던 화산댁은 암으로 가고

 술독 같이 부글대던 화산집은 썰렁한 화산수퍼로 바뀌었다.

 창녕으로 넘어가는 흙길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낯설고 무심한 얼굴로 표지판이 들어섰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반겨줄 사람 없고

 

 퉁퉁 부은 다리 같이 낡은 다리 지나 슬라브 지붕의 화산수퍼,

 중풍 걸린 화산댁 딸이 고장 난 자판기 모양 앉아 있다.

 자신의 몸처럼 뒤틀어진 내면內面을 들여다보듯

 먼지 낀 세월 너머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모자 벗고 알은 체를 해도 헤벌쭉 웃기만 한다.

 라면, 새우깡, 오징어땅콩 봉지들이

 파리 떼 들끓는 노점 물건처럼 널브러져 있다.

 화산댁이 이정표를 대신해주던 삼거리에서

 오늘은 내가 길을 잃고 모호한 구름 되어 떠돈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반겨줄 사람 없고

 

 

 

 

 『문학청춘』2012년 여름호

 

 

 

 

 -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이서국으로 들어가다><구멍><물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