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욕조 / 신영배
사진:네이버포토
풀밭 위의 욕조
- 신영배
약을 먹고 토해낸 초록색 위액이 땅을 적셔 초록 풀잎들이 자라나
연두색 바람을 얻은 내 날개가 땅을 한 바닥 세차게 밀어올렸지
욕조는 기우뚱해
우린 마주 보며 전진해 너와 나의 눈 속은 점의 연속
어둠은 빌딩의 벽을 타고 오르며 창문마다 철망을 치고 있어
우리는 욕조 속에서 노를 저어 한 물결 내달렸지 밤을 한 바닥 밀었지
밤은 제자리야
철망의 한 구멍으로 검은 바람 소녀가 들어오고 있어
주삿바늘 자국으로 팔이 모자이크 된 저 소녀를 우리 욕조에 태울까 죽은 고양이 한 마리 정도
욕조는 제자리야
밤을 떠도는 구름들은 풀밭에 내려앉아 몸의 내장을 긁어내고 다시 붕 떠올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세상의 모든 하수구가 이 풀밭 밑을 지나
버려져 흘러 들어온 이들의 물기 위에 욕조가 떠있어
노를 저어 물 위를 달려
붉은 삽으로 구름의 내장을 헤치고 저 사내 흰 무덤을 파고 있어 풀밭 위에서
우리 둘이 알몸으로 들어찬 욕조를 말이야
내가 물 위에 떠서 잠이 들 때 넌 옆에서 약을 먹고 물 밑으로 가라앉았지
너를 끌어올려 길고 가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구겨 넣었어
녹색 약물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네 몸을 펌프질해
초록 풀잎들이 자라나 욕조를 들어 올려
우린 마주 보며 전진해
시집『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문지 2009년
- 1972년 충남 태안 출생. 2001년<포에지>로 등단
시집<기억이동장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