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그 시집, 나팔꽃 담장 / 김선우

폴래폴래 2012. 5. 11. 16:32

 

 

 

 

 

 

 

 

  그 시집, 나팔꽃 담장

 

                                        - 김선우

 

 

 

 ‘안녕’ 이라고 인사하는 수줍은 목소리들의 생생함

 태어난 적 없는 빛처럼 아유, 깜짝이야

 전등이 깜빡 켜지거나 꺼지고

 촛불을 새로 붙이거나 불어 끄며

 ‘안녕’ 이라고 내게 인사해준 누군가

 세상 어딘가 틀림없이 있다고 믿는 보통의 하루

 

 아이스크림콘에 입술을 대는 순간처럼

 나팔꽃이 반짝, 켜진다

 시간은 항상 지금밖에 없어

 나팔꽃 속에서 트럼펫 불며 방들이 밝아진다

 단잠 몇 조각 날아가듯 나비들 어른거리고

 새로 도착한 첫날 속으로 침샘이 흐른다

 

 시간은 항상 배가 고프지

 너에게로 팔을 벌려 하루살이의 혀로 키스한다

 ‘안녕’ 이라고 인사해준 너라는 시집,

 “안녕,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아주 기뻐 오늘”

 백두 송이 나팔꽃이 핀 담장의 맨 끝에서

 오늘의 시집 후기를 읽는다

 

 

 

 시집『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년

 

 

 

─시인의 말

 

 

 뜻밖에도 설렌다. 처음 떠나는 모험처럼.

 

 나는 여전히 시가

 아름다움에의 기록의지라고 믿는 종족이다.

 운명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이것은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시집이다,

라고 독자들이 말해주면 좋겠다.

 사랑한,

 사랑하는,

 아름답고 아픈 세상에 이 시집을 바친다.

 

                       2012년 새봄 강원도에서

                                              김선우

 

 

 

 

 - 1970년 강릉 출생. 1996년『창작과비평』겨울호 등단.

  시집<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산문집, 동화, 소설 등

  현대문학상, 천상병시상 수상.